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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찬양한 2014. 3. 29. 01:08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레슬리 스티븐슨

데이비드 L. 헤이버먼 지음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종교에서 철학, 다윈주의와 같은 진화론적인 과학에 이르기까지 고찰한 내용으로 철학을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인간론의 대중판이자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가진 무게가 그리 가볍거나 쉽게 읽혀지진 않는다

.

내용이 좀 많은 편이고 간추리기 어렵기 때문에 읽으면서 순수하게 주관적 입장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살펴본다.

 

 

1. 유교편

 

공자가 생각하는 궁극적인 완성은 하늘이 내려준 초월적인 덕을 우리 몸에 배양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물질적 안락이 결국 ‘운명’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는 지금까지의 부질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앞으로는 하늘의 덕을 추구하는데 더욱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 - 이는 사회적 성공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 이야말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록 지나치게 규범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공자의 주장은 인간의 삶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다섯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1)사람들이 점점 이익에 집착한다. (2)사회에서 효가 사라졌다. (3)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4)성인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가 만연해 있다. (5)세상에 너그러움(仁)이 결여되었다.

 

인간존재의 여러 병폐에 대한 공자의 처방은 주로 자기 수양에 근거하고 있다.

오로지 이익만을 고려해 행동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공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동”을 제안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것은 어떤 일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할 뿐이지,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음을 말한다. 공자에게 도덕적 노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자가 제시한 또 다른 처방은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자기수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보다 중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보았다.

도덕적 완성을 이루기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사욕을 ‘의례’에 복종시켜야만 한다.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禮)에 돌아감이 인(仁)을 하는 것이다”

 

2. 힌두교

 

우파니샤드 힌두교

우파니샤드: “가까이 앉는다” 비밀스런 가르침이라는 의미

 

우파니샤드에 깃든 중심적인 철학적 성향 가운데 하나는, 우주 전체의 배후에 어떤 단일하며 통일적인 원칙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즉 궁극적인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면, 겉으로는 다양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가 결국 서로 연관된 통일성 가운데 하나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브라흐만’ : 통일성의 “궁극적 실재”

 

우리는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결국 ‘브라흐만’이라는 단일하며 통일적인 원칙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브라흐만’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이 세계를 완전히 넘어선 것이다. 그리하여 ‘브라흐만’은 종종 “(이것도)아니요, (저것도) 아니요(neti neti)"라고 표현된다.

반면에 오히려 ‘브라흐만’을 우리가 감각을 통해 경험하는 만물과 동일시하는 대목도 있다.

앞에서 말한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요” 라는 시각과는 정반대로, 이 대목에서는 “이것으로 되어 있고, 저것으로 되어 있다” 고 말한다. ‘브라흐만’을 묘사하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은 결국 세계와 자아를 보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연결되며, 그로 인해 종교적 실천 중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빚어지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의 주된 목표는 육체와 연관된 일시적인 자기-자아로부터, 만물과 결코 다르지 않은 영원하고 무한한 자아에게로 우리의 정체성을 이전시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목표는 ‘아따만’이 곧 ‘브라흐만’임을 깨닫는 데 있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혼자인 개인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가 않다. 개별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삶은 크게 조건화되고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을 결정짓는 요소를 바로 ‘까르마(業)’라고 하는데,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는 훗날 힌두 사상에서 무척이나 중요해진 이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만드는 대로 행하는 대로 그렇게 되리니,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자가 될 것이요, 악한 일을 하면 악한 자가 될 것입니다. 선이란 선한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이요, 악이란 악한 행위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율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은 실상 무척이나 불확정적이며, 다만 이전의 행동이 빚어낸 힘에 의해 규정된다. 야자발끼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원하는[욕망하는] 대로 그대로 의지가 생기고, 의지가 생김으로써 업[까르마]을 쌓고, 업을 쌓음으로써 (그 결과를) 드디어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이렇게 심리학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의 환경에서는 자유행동이 결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욕망에 따라 행동하며, 그 욕망 자체는 어떤 이전의 행동의 결과로, 우리의 무의식적 정신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어떤 행동의 동기로 나타난다. 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 행동 역시 우리의 정신에 또 다른 인상을 남겨두게 되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욕망의 성격이 결정되며, 이 또 다른 욕망은 곧 또 다른 미래의 행동의 뿌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적 속박의 순환, 즉 우리 인간이 처한 곤경의 모습인 것이다. 힌두교의 요가와 명상은 대부분 이처럼 제한되고 규정된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3. 기독교

 

기독교의 주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수라는 이 역사적 인물, 즉 로마의 식민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았고, 설교했고,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했던 예수 안에 하느님의 매우 특별한 계시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를 이른바 ‘성육신(聖肉身)’의 교리로 설명한다. 즉 예수는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며, 그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 곧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른바 성육신, 즉 하느님이 ‘유일무이하게’ 예수 안에 존재한다는 기본 개념이야말로 기독교에서는 가장 확고한 교리이다.

 

4. 플라톤

 

‘형상’에서 중요한 형이상학적 측면은, 플라톤이 이 ‘형상’을 물질 자체보다도 더욱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편, 이것을 결코 변하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고,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생각한 점이다. 물질적 대상들은 파손되거나 파괴될 수 있지만, ‘형상’들은 공간이나 시간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으로는 알 수도 없고, 오로지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플라톤의 거대한 형이상학 이론은 변화하고 파괴되는 사물의 세계 너머에 이처럼 불변하는 영원한 ‘형상’들을 포함한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은 단지 이러한 궁극적인 실재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우리 인간의 상태를 마치 쇠사슬에 매인 죄수들과 같다고 묘사했다. 즉 동굴 안쪽의 벽만을 바라보게 해 놓았기 때문에, 벽에 비친 그림자만 알고 있을 뿐, 동굴 밖에 있는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이다.

 

플라톤은 이원론적 시각을 지닌 대표적인 사상가로, 그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 혹은 정신은 육체와 떨어져서도 존재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고, 소멸이 불가능하며,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어떤 식으로건 내적 갈등이 존재하는 곳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다른 요소가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말한 목마른 사람의 경우에는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한 가지 요소와, 정작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요소가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첫 번째 요소를 “욕구”라 불렀고, 두 번째 요소를 “이성”이라 불렀다. - 중략 - 플라톤은 이와 같은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안에 이른바 “격정” 혹은 기개라고 하는 세 번째 요소가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한 그의 논증이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단순히 그런 욕망의 불합리성과 불건정성에 대한 지적 인식과는 다르며, 오히려 자기혐오의 ‘감정’과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에 ‘격정’과 ‘이성’은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 중략 -

어쩌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요소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성, 의지, 비육체적인 동기나 충동, 감정 그리고 육체적 요구로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플라톤의 이론에서 또 한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즉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이다.

농부, 장인, 군인, 행정가 등이 각자의 성격과 훈련과 경험에 따라 어느 한가지 일을 전문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분화는 사회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이)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국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북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4.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즉 영혼은 육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데(결국 플라톤과 반대이다) 그 까닭은 영혼이 일종의 육체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실은 그 어떤 종류의 사물도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영혼은 살아 있는 육체들의 복합적 특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a)인간의 완성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향유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행동’, 즉 우리의 능력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고, (b)그것은 우리 인간의 특징인 ‘이성적’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런 행동은 반드시 “훌륭하게” 수행됨으로써 최상의, 가장 완벽한 종류의 “탁월함”, 혹은 ‘덕(德)’을 표현하고, (d)나아가 그야말로 ‘평생’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칸트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배후에 있는 한 가지 설득력 있는 통찰은, 비록 물리적 대상이 우리의 사고나 지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긴 하지만(그리고 대부분의 물리적 우주는 인류의 존재보다도 훨씬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고 사고하는 ‘방식’은 단지 외부의 사물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작용하는 바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외부입력이 우리의 정신을 통해 처리되는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달려있다는 그의 깨달음이다.

 

그는 인간의 지각 방식(우리의 “직관의 형식”)이 우리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체계적으로 왜곡시키고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오로지 “보이는 그대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수이성비판』의 “두 번째 유추”에서 칸트는 보편적 결정론 - 이는 모든 사건에는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즉 그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상태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 은 과학의 전제이며, 또한 이 세계에 대한 여러 경험론적 지식의 전제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모든 물질적 사건의 원인을 또 다른 물질적 사건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는 정신을 가르켜 두뇌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치는 비물질적 실체라고 주장한 데카르트의 상호작용적인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첫번째 유추”에서 칸트는 이 세계의 모든 사건(정신적 처리과정을 포함한)은 영속적인 “실체”, 즉 물질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 번째 유추”에서 그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물리적 실재의 단일하며 상호작용하는 체계 중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안에는 악에의 자연적 성향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성향 자체는 결국은 자유로운 선택의지 안에서 구해지지 않으면 안 되고, 따라서 그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므로,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 악은 모든 준칙(공리)들의 근거를 부패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적 성향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근절’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에의 성향은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므로, 그의 극복은 가능한 것이다.

 

6.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정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즉 단순히 ‘관념’도 아니고, 어떠한 우주적인 ‘영혼’도 아닌, 오히려 인간 생활의 ‘경제적’ 조건 안에 역사의 핵심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소외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은 노동자와는 낯선(소외된)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산 과정을 감독하며, 그렇게 해서 나온 상품을 사유재산으로 소유하고, 따라서 피고용자들을 착취하는 다른 누군가 - 즉 자본가 -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의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력들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 관계들에 들어선다.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해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7.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연구방법의 첫 번째 특징은 그가 정신의 영역에까지 결정론 - 즉 모든 사건에는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을 엄격하게 적용한 점이다. 가령 프로이트는 실언이나 실수, 혹은 꿈이나 신경증적 증후와 같이 이전까지는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조차도 사실은 어떤 숨겨진 원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분명하다고 간주했다.

- 중략

 

두 번째 특징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도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 - 이른바 ‘무의식적’ 정신 상태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무의식”이란, 이른바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의식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유명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의 정신은 마치 빙산과 같아서, 파도가 높아지고 낮아짐에 따라 간혹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은 단지 일각에 불과하며, 그 밑에 있는 안 보이는 거대한 덩어리가 여전히 그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제3기에 해당하는 이 마지막 시기에 그는 정신적 장치 내의 세 가지 구조를 구분했다. ‘이드’는 마치 어린아이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본능적 충동을 포함하는 것이었다.(이는 바로 “쾌락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자아’는 의식적인 정신상태에 해당되는데, 그 역할은 현실세계를 지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이 세계와 이드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자아’는 이른바 “현실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이때 ‘자아’에 속하는 것들은 의식적인 것이 되는 반면, ‘이드’에 속하는 것들은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다. ‘초자아’는 정신에서도 특별한 부분으로 양심(즉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배우게 되는 도덕적 규범)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마치 엄격한 부모와 마찬가지로 규율과 금지를 내세우며 자아와 대립한다. 억압의 힘은 자아와 초자아 모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대게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자아는 딱하게도 종종 현실 세계의 불리한 사실들 속에서 이드와 초자아 사이의 상충되는 요구를 화해시켜야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고 있다. 외적 문제와 내적 갈등으로 둘러싸인 이런 현실이야말로 인간의 상태에 대해 프로이트가 그려 보이는 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네 번째 주요 핵심은 인간 개인의 성격에 대한 발달적인 설명이다. 우리의 인성이 유전적 자질뿐만 아니라 경험에도 크게 의거해 형성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의 심리적-성적 발전단계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성욕의 개념을 우리 육체의 연관 부분에서 느껴지는 모든 쾌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유아가 가장 먼저 입으로부터 성적인 쾌감을 얻으며(구강기), 그 다음에는 소화관의 맨 끝부분으로부터 성적인 쾌감을 얻는다고(항문기) 주장했다. 이후에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가 남성의 성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다.(남근기)

 

프로이트는 특히 한 가지 정신작용이 신경증적 질환의 원인으로 중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억압’이다. 정신적 갈등 - 즉 우리가 지닌 본능적 충동과,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크게 상충하는 경험 -을 겪으면 이 충동은 억압되어 우리의 의식 밖으로 밀려나게 되며, 그로 인해 이후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8. 니체

 

니체는 “신은 죽었다”(즉 종교적 믿음의 허상이 이젠 빤히 들여다보인다)면서, 따라서 우리는 삶의 모든 기반을 다시 생각해야만 하며, 오로지 인간의 입장에서만 우리의 의미와 의도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경험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특징이다.

 

9. 샤르트르

 

샤르트르는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관해서도 매우 색다른 견해를 펼친다. 즉 『존재와 무』의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가 따라야 할 어떤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가치관 - 하는님의 십계명이건, 아니면 플라톤이 말한 선의 형성이건 간에 - 은 없다. 아울러 인간의 존재에 어떤 고유한 의미나 목적 같은 것 -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 도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부조리한”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계에 “팽개쳐진” 혹은 “버려진” 존재이다. 우리에게 뭘 하라고 지시하거나, 혹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도와주는 하느님 아버지 따위는 없다, 우리는 각자 성인의 자격으로 혼자 결정하고, 또한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샤르트르는 우리가 유일하게 지닌 가치의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선택뿐이라고 거듭해서 주장한다. 반면 어느 누구나 선뜻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외적으로나 객관적으로 정당화된 가치관이나 계획이나 삶의 방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샤르트르의 분석에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불성실”이다. (종종 자기기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불성실은 곧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상황이나 성격, 타인과의 관계, 직업이나 사회적 역할 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상상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말한다. 샤르트르는 불성실이야말로 대부분의 인간의 삶에서 특징적인 양식이라고 믿고 있다.

샤르트르는 사람이 하나의 단일체이며 단순히 개별적인 욕망이나 습관의 다발은 아닌 까닭에, 각 사람은 저마다의 삶의 모든 국면의 배후에 어떤 궁극적인 의미나 목적을 부여해 주는 선택(혹은 “근원적인 기도(企圖)”)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가 샤르트르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모든 의식 있는 존재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근본적인 진실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각자의 자유를 구체적인 방법들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따라서 인간 사회는 이것을 모두에게 실현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만 한다는 가치판단까지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첫째로, 그의 철학은 우리에게 보다 진정으로 자각하라고, 우리의 자유를 사용해서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라고 촉구한다. 둘째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게 하는 전세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10. 다윈주의(진화론)

다윈주의는 너무 다양한 학자의 이론이 있어서 읽고 나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짚어낼 수 없었다.

 

서론으로 돌아가면 저자는 이 방대한 이론들 중 어느것이 정답이라 말할 수 없으며 동의는 순수한 독자의 몫임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이론의 신봉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우리는 당신의 신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다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것뿐이다. 당신의 이론을 다른 이론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당신이 어느 정도까지 동의하고 또 동의하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이론에 대한 반론에 스스로가 얼마나 잘 답변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그런 전통 가운데 어떤 부분이 가장 본질적인 것인지, 혹은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 한편으로는 어떤 부분이 임의적인 것인지를 - 즉 역사적 중요성이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는 것인지를 -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어떤 단계에서든 여러분이 무엇을 지지할 것인지(혹은 바꿀 것인지)는 오로지 여러분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을 끝까지 읽었지만 과연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는 결론 내릴 수 없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인간의 본성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고 나름대로 희미하게나마 인간은 어떠한 존재일까에 대한 약간의 결론을 가질 수 있었다.

 

출처 : 에머럴드 빛 추억남기기
글쓴이 : 이승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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